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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넘어서는 성령의 충만한 삶

by PastorKang posted Dec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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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넘어서는 성령의 충만한 삶”

 

이진우의 “니체의 인생강의”에서 그는 니체의 사상을 이렇게 정리한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뢰켄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과 교수가 된 때는 1869년이었다. 10년 단위로 그의 삶은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879년 바젤 대학교 교수직을 사직 했고, 그 후 10년 간 자유로운 작가이자 사상가로 방랑 했고, 1889년 1월 3일 토리노에서 발작하여 1900년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죽을 때까지 정신적인 암흑기로 살아갔다. 19세기 의심의 대표적 사상가로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가 있다. 17~18세기에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발전. 뉴턴의 운동법칙, 기차 등 수많은 신기술이 인간의 삶을 지배했다. 찰스 다윈도 니체와 동시대에 살았다. 이른 시대적 배경은 신의 죽음을 예감할 수 있게 했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한 것은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던 모든 형이상학적 근거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근거가 발 밑에서 사라져버리고, 우리가 의지하고 믿었던 중심이 없어져버리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지평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이다. 신의 죽음은 허무주의를 가져왔다. 허무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이 니체가 신의 죽음이라는 도발적인 명제로 의도한 본래 목적이다.

어떻게 허무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두 가지로, 하나는 수동적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왜’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상태로, 어떤 시도도 해보지 않는 무능력의 표현이다. 니체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능동적 허무주의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진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최고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지만, 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면 스스로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니체가 이야기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 The will to power)를 발견한다. 우리의 의지는 항상 권력을 향해 있다는 말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의지가 있는데, 그것은 항상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위버멘쉬(초인), 위버는 무엇을 넘어서라는 뜻이고, 멘쉬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 초인 사랑의 핵심문제이다. 최후의 인간은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니체는 신이 죽고 난 후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대안은 초인이 되든가,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초인과 최후의 인간은 대립적이다. 니체는 세 가지 변신의 단계에 대해서 말한다. 순종과 복종의 낙타의 단계, 자유 의지를 향한 사자의 단계(네가 자유를 원한다면 명령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 나 자신이 되는 어린아이의 단계로의 변신을 말한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자신의 운명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삶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과 실존과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이 니체의 아모르 파티 사상이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니체의 사상은 진지하게 도전한다. 운명과 실존을 사랑하며 능동적으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해 가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는 소중하다. 그것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설명하고 변증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들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다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언제나 한계가 있다. 인간의 가장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가장 어리석은 것에도 이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 이해하고 알 수 있겠는가. 니체 역시 다 이해하지 못해, 그 인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지혜와 지식과 부를 소유했던 솔로몬의 진실한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라.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전도서12장)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더 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먼저 인생을 찾아왔고, 만나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은 성령이 임했고, 그로 말미암아 영적 경험을 한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은혜의 흔적, 영적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을 다 이해하거나 알 수 없을지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생활이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순 없어도 믿고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다. 그 안에서 단순함과 명료함과 기쁨을 누리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다. 결론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먼저이다.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렘 51:6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