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 안에서 나를 찾아간다”
어떤 상황이나 결과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나 결과물을 가지고 누군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똑같이 거대한 장애물을 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거대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고 꿈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거대한 장애물이 있는 것은 현실이지만, 그 현실보다 더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며 기꺼이 도전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바라봄은 “거인 앞에서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들을 밥으로 생각하고 뛰어넘는 인생을 살 것인가?”의 차이를 가져온다.
거대한 장애물을 밥으로 생각하고 도전한다고 해서 쉽게 뛰어 넘는 것은 아니다. 넘어질 수 있다. 반복적으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넘어짐은 걷고 달리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니까 넘어질수록 걷고 뛸 수 있는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실패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이길 있는 것은 실패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물론 전제 조건이 있다. 나 역시 하나님만 섬기고 따라가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까? 그 이유는 나의 성품과 삶의 열매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은 그의 선택에 신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사랑하니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준, 그 위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온전히 찾을 수 있다. 그 위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그 삶의 목적과 방향을 온전히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넘어짐과 실패가 있을지라도 신분의 정체성이 분명하니, 다시 일어나 신분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달려 갈 길 모두 마친 후에 기쁨의 미소로 고백하길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대하 3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