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묵상나눔

지금 내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by PastorKang posted Mar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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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병든 자가 의사를 찾아가듯, 죄인이 찾아가야 할 곳은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해 왔다. 그러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병든 자인지 알지 못해 병원을 찾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고, 부끄러운 허물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다. 지금 당장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모면하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연약한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나아갈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치유와 건강한 삶의 외적 증거는 “지금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살피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삭개오는 예수님 당시 세리장이었다.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았다. 아마도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삭개오는 부자였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 매국노, 못난 놈’이라고 비난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세리장의 위치와 부유함으로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돈과 권력은 삭개오가 살아가는 힘이었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왔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치유와 변화의 삶을 살아간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속여서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네 배나 쳐서 돌려준다. 이 정도면 삭개오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남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계산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삭개오가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돈은 삭개오에게 정체성과 살아가는 힘을 주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마치 땅 속에 감추인 값비싼 보물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과 같다. 그 보물의 가치를 발견하니까,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그것만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따스한 미소와 사랑스런 눈빛으로 삭개오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예수님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심지어 다들 꺼려하는 삭개오의 집을 심방하며 그와 함께 머물러준 사람도 예수님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대해 익숙했다. 삭개오는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고 소외된 자와 함께 하며 그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이 소문이 진짜라는 것을 직접 경험 했고, 자신이 바로 그 치유와 구원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지금까지 자신을 받치고 있었던 돈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돈은 예수님을 만나 내면과 삶이 치유되고, 구원받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과 더 이상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 치유와 건강한 삶의 외적 증거는 “지금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놓칠 수 없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과연 지금도 그 고백이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일상의 삶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고 있는가? 도움을 받기도 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일에 즐거이 참여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