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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by PastorKang posted Feb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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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사소한 일에 쉽게 분노로 반응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일에 분노할 때에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사소한 일마다 쉽게 꾸짖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꾸짖을 때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온유한 자가 강하게 꾸짖고, 분노할 때에는 긴장하고 주의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화가 일상인 자가 꾸짖고, 분노할 때에는 두려워서 듣는 척할 뿐이지 주의깊게 듣지 않는다. 온유한 자가 꾸짖을 때에는 효과가 있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만, 분노하는 자가 꾸짖으면 역효과가 일어나 관계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단절될 수 있다. 분노를 내려놓고 온유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도 세우는 비결이다. 

 

온유한 자라고 분노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완전 온유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화의 감정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분노로 표출할 때에는 분명 죄가 된다. 화나는 감정은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분노로 표출하여 누군가를 공격하고 상처를 주고 관계를 깨뜨릴 때에는 죄가 된다. 지금까지 온유한 자로 살았을지라도 자신의 감정에 따라 분노를 표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것은 선하지 않다. 잘못 했다. 회개해야 한다.’ 분노를 다스리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혹 분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면, 반드시 회개하고 당사자에게 정식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여러 변명으로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된다.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그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그 권위자에게 순종한다. 권위자가 하나님에게 불순종 한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권위자에게 불순종 하는 것이 맞다. 권위자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권위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거짓된 길로 가는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불순종 하는 것과 같다. 그때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권위자에게 불순종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것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거짓된 길인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오만과 편견, 다양한 이해관계와 감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을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사실과 거짓이 서로 얽혀 자칫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모두가 사실만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리고 욕심 없이 선한 마음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다툼이 일어나고 분노가 터지고 편을 나누어 분열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모두가 선하고 진실을 말하는데, 왜 분노와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가? 웃픈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정의라는 탈을 쓴 분노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것은 설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상처와 관계의 단절에 이르게 한다.

 

자녀로 인해 속상하고 분노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부모와 이야기하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질문하고 길을 찾아가다 보면, 대부분의 경우 아이보다 부모의 문제가 앞선다. 부모의 상처, 열등감, 자존감, 기대, 인정, 치유되지 않는 감정, 원망, 분노, 우울과 같은 것들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편견과 오만과 열등감과 우월감의 그릇된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의 속마음과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인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없으면서 아이를 잘 아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한다. 부모는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이것은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지!’ 자신의 기준과 기대를 가지고 아이를 판단한다. 그것에 이르지 않으면 소리를 높이고, 듣지 않으면 점점 더 소리가 높아지고, 결국 분노가 폭발한다. 결국 남는 것은 피차 간에 깊은 상처와 소통의 단절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너는 어쩜 그렇게 하나도 도와 주지 않니?’ 그렇게 울며, 분노하며 좌절하고 우울해 한다. 정말 그럴까? 부모의 기대와 기준에 아이가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아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경험이 아이의 상황과 기질에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 오히려 아이의 문제가 아닌 내 안에 문제가 있음을 보고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고 치유하는 것이 먼저일 때가 많다. 그런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 마음과 생각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고 공감력을 높일 수 있다. 이해와 공감이 커질수록 소통은 쉽고 더 깊어지고 그 내면과 삶의 필요와 해야 할 것들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조직과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분노하고 원망하며 자신의 뜻대로 이끌고자 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치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며 소리친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억할함과 분함과 권위와 명예를 위한 것이지 잘 분별해야 한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 하시매 당이 두러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시 76:7~9